[임윤아 칼럼] 영화 〈킬유어달링〉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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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아 칼럼] 영화 〈킬유어달링〉의 오류
  • 임윤아
  • 승인 2020.06.25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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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킬유어달링〉

2014년에 개봉한 영화 〈킬 유어 달링〉은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기에 이름난 시인의 삶을 모티브로 삼았다.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으며 1950년 비트 제너레이션 시대를 살았다. 대표작으로서는 1956년作 〈울부짖음〉이 있다.

앨린 긴즈버그 이외에도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우즈 작가가 등장한다. 잭 케루악의 경우 〈길 위에서〉라는 장편소설을 내어 주목을 받았다. 윌리엄 버로우즈의 경우 1953년作 〈정키〉를 통해 제 작가적 가치를 알렸다. 꾸준히 집필 활동과 출간 활동을 이어왔다. 그중 벌거벗은 점심이라는 작품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손에서 영화 〈네이키드 런치〉로 재탄생했다.

▲영화 〈킬 유어 달링〉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킬 유어 달링〉 (사진=네이버 영화)

루시엔 카는 두 번 결혼을 하여 세 자녀를 뒀으며 배우 데인드한의 손에서 현실감 있게 다시 태어났다.

이 영화는 주연을 맡은 배우들과 더불어 영화 특유의 분위기로 먼저 화제를 샀는데, 사실 이 영화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다름 아닌 실제 루시엔 카와 데이빗의 관계와 영화에서 빚어진 관계가 다르다는 것. 한 마디로 실제 루시엔 카와 데이빗은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 데이빗은 루시엔 카의 뒤를 쫓으며 집요함을 보인 스토커에 가까웠다.

루시엔 카가 데이빗을 향한 감정은 사랑도, 연민도, 아픔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루시엔 카의 아들 역시 이 영화가 지닌 치명적 오류점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영화 〈킬 유어 달링〉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킬 유어 달링〉 (사진=네이버 영화)

문학인으로서의 정점이 아닌 시작점을 다루니만큼 섬세한 연출이 필요하다. 왜곡지점이 있어 상처를 주는 필름이 아닌 어느정도 정확한 실체성을 지닌 작품으로 거듭나야한다. 그것이 실존했던 당대 문학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같은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태도라고 보여진다.

실제 문학인을 영화로 재탄생시킨 작품은 〈토탈 이클립스〉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영화는 1995년作으로 천재라고 불린 시인 아더 랭보의 삶을 다루었다.

천재는 역시 단명하는가에 대한 미신적 이야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쥐여주는 이 작품은 아더 랭보의 인간적인 면에 더 치중되어 있다. 그의 타고난 천재성이 그의 비관한 인생으로 인해 가려진 듯한 감상이 인다. 그가 지닌 예술적 깊이보다 그 역시 하나의 인간이며 치열한 삶 속 고난의 길을 걸어왔음을 카메라 워킹으로 실감나게 보여준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토탈 이클립스〉 (사진=네이버 영화)

모든 작품은 한 사람의 인생에 의해 연출된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작품으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존중받아야 할 한 인간이며 사람 냄새나는 과정을 갖고 있다. 그들이 지닌 각각의 희극과 비극을 엉성하게 이야기할 바에야 작품으로만 그들을 만나는 편이 더욱더 유의미할 것이다.

킬 유어 달링은 실존인물을 영화로서 재기할 때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적어도 실존인물을 배우를 통해 다시 그릴 때 완벽한 모순점은 없어야 된다는 교훈을 알렸다. 외형적인 부분 이외에도 최대한 실제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의 인생과 인간성을 존중한다는 확실한 의사 표현이겠다. 동시에 그들을 기억하겠다는 하나의 메시지로서도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야 한다. 이로써 새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이는 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회자될 것이다. 재창조의 순환으로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임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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