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환 칼럼]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
상태바
[박세환 칼럼]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
  • 박세환 기자
  • 승인 2019.11.11 1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셜워치 박세환 기자] 페미니스트들은 이따금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대상으로 보이는 자체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된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이들은 ‘남녀 간 성욕 차이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 '남성의 성욕이 더 강하다'를 수용한다 해도, 또 그 때문에 여성에 대한 많은 성범죄가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피해 서사로 이어지는지 여부는 한번 집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 쪽이 더 ‘저돌적’이라는 경향성을 인정한다면, 여성은 항상 피해자라는 서사는 정당해지는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KT에서 ‘공대 아름이’라는 주제로 신기한 광고를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여자가 ‘아름이’ 한 명밖에 없는 어느 공대 학과에서 MT를 가기로 했는데, 개인 사정에 의해 아름이가 엠티에 참석할 수 없게 돼버렸다. 그러자 학과의 모든 남학생이 “I ♥ 아름”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서 “아름아 엠티 가자”를 외치며 소위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에 못 이긴 아름이는 결국 엠티에 참석하기로 한다.

▲KT 광고의 한 장면
▲KT 광고의 한 장면

그런데 엠티 장소에서 남학생들이 아름이를 중심에 놓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중, 바로 옆방으로 여대생들이 엠티를 오게 되고 이 소식을 접한 남학생들이 여대생들을 구경하러 우르르 몰려나감으로써 아름이는 얼떨결에 혼자가 되고 만다.

이 광고는 남성에 의해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그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이? 동료 남학우들로부터 명백하게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아름이가 괴로워했는가?”라는 부분이다. 당연히 광고 속의 아름이는 자신이 ‘공대 여신으로 여겨짐’을 적당히 즐거워한다.

광고의 마지막은 특별히 인상적이다. ‘옆방 여대’가 모든 남학생을 끌어드림으로써, 사실 그 지점에서 아름이는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더는 남자들로부터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 그래서 아름이가 기뻐하는가? 광고 속의 아름이는 이 지점에서 볼펜을 땅바닥으로 집어 던지며 불쾌해한다.

아름이는 성적 대상화를 통해 손해를 보지 않았다. 성적 대상화가 그녀에게 권력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성적 대상화로 인해 아름이는 동료 남학우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보통 공대는 남학생들이 많이 진학한다. 그 때문에 공대에는 항상 여자가 적다. 남자는 많은데 여자는 적다 보니, 한창 욕구 왕성할 시기의 남학생들이 소수의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매달리는 경향이 생겼다.

소수의 여성이 이것을 성적 권력으로 활용하여 과제 활동 내지 식비 지출 등에서 남학생들을 상대로 많은 이득을 얻어내는 상황 역시 발생하게 됐다. 희소성의 가치를 극대화해 ‘여신’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이 현상을 대학가에선 ‘공대 아름이 현상’이라고 불렀는데 KT가 광고를 통해 이 현상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해냈다.

그럼 여성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하는 예체능계와 같은 곳에선 어떨까? ‘공대 아름이’에 비견할 만한 ‘미대 지훈이’ 내지 ‘음대 성준이’ 현상도 일어날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자 초과 학과의 소수 남학생은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대상으로 여겨짐’이라는 것이 여성에게 손해로만 작용하고 있는가? 물론 이로 인해 명백히 피해가 되는 측면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권 의식의 개선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성적 침해 현상은 갈수록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엔 죄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도 이젠 명백하게 잘못이라 인식되고 있다. 그 속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괴롭힘당할’ 여지는 계속 줄어가는 것이다.

반면에 성적 대상화로 인한 이득, 위에 언급한 ‘공대 아름이 현상’과 같은 성권력은 유지된다. 이 현상은 남녀 간의 성비 격차가 벌어질수록 더욱 심화한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 나온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연계된 모든 것들을 ‘노예의 미덕’으로 폄하했다.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긍정적 측면들은 담론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됐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던 여성들 역시 많았다. 여기서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최악의 실책이 드러난다.

‘코르셋’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여성들을, ‘스스로 노예가 되길 자처하는 하찮은 *흉자들’로 매도하고 배척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배척된 여성들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것에 있었다.

*흉자: 흉내자지의 줄임말로 '남성의 편을 드는 여성'이란 의미

남성이 아닌 여성들로부터 레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저항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많은 대학에서 나타난 총 여학생회 폐지 현상은 여학생들의 적극적 협조를 가정하지 않고서야 아예 설명되지 않는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