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민 칼럼] 아도르노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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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민 칼럼] 아도르노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
  • 성상민 객원기자
  • 승인 2020.06.17 14: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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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도구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으로 분리되지 않아
아도르노가 비판한 근대 수량적, 객관적 사고가 오히려 가치 중심적 사고의 폐단을 막는다

페미니스트이자 칼럼니스트인 위근우씨가 한껏 멋을 부려가며 만들어낸 문장들 중 현대 철학자 '아도르노'에 관한 문장이 있었다.

"아도르노의 글은 섬세하고 예민한 영혼을 잔인한 세상에 내던져 산산조각 낸 뒤, 그 파편들의 반짝거림을 통해 세상의 잔인함을 묘사하는 느낌이다."

이 문장을 통해 느끼게 되는 여러 가지 감정과는 별개로, 그가 묘사했던 아도르노의 철학은 현 시국에서 한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부족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아도르노에 관한 지식과 더불어 그의 철학을 짤막하게나마 비판해보려고 한다.


아도르노와 포스트모던에 관한 개요

아도르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스트모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포스트모던의 개념을 설명하자면 포스트모던이란 근대(모던) 이후(포스트)에 생겨났던 모든 철학적 사조들을 아울러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근대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근대는 특정 시대의 의미보다도 그 시대를 통괄했던 특징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이성'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철학은 이러한 "근대 이성의 개념을 비판하며 등장했던 모든 철학적 사조"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기억해두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비롯해 프로이트의 무의식, 라캉의 욕망, 데리다의 해체(근대 이성이 쌓아 올린 형이상학의 해체)등과 같은 개념들이 철학적 담론으로 떠올랐던 것은 모두 이런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아도르노 또한 이런 계열의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철학자 아도르노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철학자 아도르노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것 역시 근대적 이성이었다. 특히 그는 이성의 도구적 특징을 비판했는데, 이 이성의 도구적 특징 이란 인간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세계를 정복하고 개발하며 개량시킬 때 사용되는 이성의 특징을 말한다.

중세의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이성이라는 계몽의 빛줄기 아래 세상을 주체적으로 개발해나가기 시작했다. 신이 약속했던 내세의 천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성은 지상에서 낙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근대 이성은 '과학 기술'이라는 최첨단의 무기를 통해 인간을 신뿐만이 아니라 질병과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근대 성문법을 통해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보편적 인권'의 개념까지 탄생시켰다. 이처럼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 끝에 발견해낸 근대 이성은 그의 수고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못하는 것이 없어 보였고, 이성을 통해 인간이 모두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팽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였다. 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던 이성은 되려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모든 대상들을 도구화해나가던 이성은 마침내 그 도구화라는 칼날을 인간에게까지 겨누기 시작했던 것이다. 1,2차 세계대전 속에서 있었던 수많은 대량학살, 우생학적 인체실험과 같은 역사적 비극은 그동안 장차 인간을 해방시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성이 가진 어두운 측면이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나치즘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나치즘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도구적 이성 또한 이런 맥락위에 서있다. 그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특히 수학적 양화를 비판했는데, 모든 것을 도구화하여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계량화 하기 위해 사물을 숫자로써 나타내는 방식(수량화)은 몰가치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숫자에는 질적 가치가 없다. 사유 없는 차디찬 양적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몰가치적인 '객관적' 숫자를 통해 인간이 인식될 때, 사람들 간의 다양한 차이와 가치는 차디찬 숫자 앞에서 그 힘을 잃고 '보편화' 되고만다. 그리하여 생겨난 근대의 괴물이 바로 전체주의와 파시즘이었다고 아도르노는 진단한다.


도구적 이성은 과연 몰가치적인 것인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나는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을 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아도르노의 이런 철학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주장대로 우리는 숫자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면서 더욱 몰가치화 된 것일까? 만약 숫자가 아닌 가치 중심의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면 그 세계는 디지털로 인식된 세계보다 더 도덕적일 수 있을까?

지난 5월 11일,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말씀인, 즉,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돕는다며 활동했던 시민단체 정대협(현 정의기역연대의 전신)으로 부터 지난 30년간 제대로 된 지원 한번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나 최근에 비례대표로 국회를 입성한 윤미향 씨를 두고 "자신들의 정치적 탐욕을 위해 우리를 이용했다"고 비판한 할머니의 주장에 대중은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강경한 보수단체를 제외하면 그동안 위안부 문제는 대중들 사이에서 감히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없는 성역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 고발자가 바로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였기에 대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현재까지 공개된 민간인 후원의 사용내역들에는 시민단체원 자녀들의 학비로 쓰였다는 의혹과 경기도에 있는 여가용 펜션 건축 의혹까지 있어 대중들의 분노는 더 증폭되고 있다. 그래서 미래대안행동연대(이하 미대행)와 같은 일부 단체들은 지난날부터 현재에 이르는 후원금액 사용내역처를 낱낱이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5월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에서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논란과 관련 기자회견 (사진=news1 제공)
▲지난 5월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에서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논란과 관련 기자회견 (사진=news1 제공)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정의기역연대는 여태껏 가치 중심적 언어들로 사람들을 기만해왔다는 점, 그리고 미대행은 그 사기 행각을 시정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용내역(숫자)을 공개하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아도르노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이 사건에서는 가치 언어가 숫자보다 더 차갑게 몰가치적으로 이용되고 오히려 객관적인 수량이 가치 지향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나영 현 정의연 이사장을 비롯해 단체 관계자들이 기자회견 때 보여주었던 태도에서 알 수 있듯, 가치 언어는 자신들의 부도덕함을 정당화하는데도 쓰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가치 언어가 추상적이고 애매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아도르노가 이성의 폭력성이라고 지적했었던 수량화, 객관화의 특징은 명백하고 투명하다는 점에서 인간이 개입될 여지가 비교적 줄어든다. 하지만 앞선 사례와 같이 가치 언어는 추상적이고 애매하기 때문에 복합적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기가 다분하며, 더 많은 몰가치적 사태를 양산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면죄부 판매 삽화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면죄부 판매 삽화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그것을 여러 차례 배운 바 있다. '신의 구원'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명분으로 면죄부를 판매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던 중세의 성직자들, '예'를 빼놓고선 인간을 말할 수 없다며 제사 상복을 몇 년 입느냐 하는 것을 명분으로 권력 암투에만 매몰되었던 조선 유학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말이다.


근대 이성에 대해 잘못 인식한 아도르노,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데카르트로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수량화, 객관화라는 근대 이성의 산물은 사실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장치들이었다. 인간의 보편의지 따위와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닌, 재산을 기준으로서 인간의 권리를 명시해놓고 정치 권력의 삼권분립을 명확히 제시해놓은 근대 성문법 또한 같은 이유에서다. 애매한 말로서 악용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측정 가능하고 명명백백하게끔 계량적으로 명시하여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를 최소화하고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바꿔말해, 아도르노가 도구적 이성이라 명명했던 그 이성에는 이미 그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비판적 이성의 개념이 이미 같이 녹아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을 저울질하고 평가하는 모든 것을 일컬어 이성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성을 도구적 측면과 비판적 측면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난센스였다.

그래서 아도르노가 도구적 이성의 폐해라고 지적했던 전체주의와 파시즘 또한 도구적 이성의 폐해라기보다는 몰이성의 폐해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다. 히틀러가 내걸었던 것은 우생학적 숫자 이전에 독일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사실 이 추상명사가 우생학을 만들었다)이라는 가치였고, 전체주의 광풍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앚아간 마르크스의 망령 역시 냉철한 사회과학적 내용이 아닌 '계급해방'이라는 가치구호에 수많은 '인간들'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아도르노의 비판과는 달리 이성은 그 자체에 문제점이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고 자부하며 자신들이 쌓아 올린 그것에 대해 또다시 저울질하고 평가하는 생각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진=DB)
▲(사진=DB)

이쯤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데카르트가 코기토 명제에 도달하게 되었던 과정을 찬찬히 되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이 애초에 '방법론적 회의'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듯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은 전력 질주하는 증기기관차나 야생마 같은 모습이 아니였다. 그저 세계에 대해 끝없는 호기심을 갖고 지긋한 자세로 천천히 손을 뻗어 내밀어 어루만져보던, 소극적이며 굼뜬 그런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랬던 데카르트가 만약 아도르노의 비판을 들었다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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